본문 바로가기 주메뉴로 바로가기 하위메뉴로 바로가기


충주 숭선사지(忠州 崇善寺地)

숭선사지는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전 862-2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2003년 5월에 사적 제445호로 지정되었다. 유적 내에서 수습된 “崇善寺”명 암키와를 통해 『高麗史』권 2 光宗 5년(954)조 “春 創崇善寺 追福先妣”의 기록과 일치되는 유적이며 광종이 모후를 위해 창건한 왕실사원임이 입증되었다. 숭선사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5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 광종 5년(954)에 창건되어 크게 두 차례의 중창불사와 여러 차례의 소규모 중수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1차 중창기는 고려 명종 12년(1182)이고, 2차 중창기는 16세기 중엽이다.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구는 중심사역에서 금당지, 영당지(추정), 탑지, 중문지, 회랑지, 답도, 우물 등이며 Ⅱ지구와 Ⅳ지구에서는 12개소의 건물지와 10개소의 석축, 암거형 배수로, 노출형 배수로, 교각 등이 확인되었다. 1차 중창기와 관련한 유물은 “□上□□監役副都監大師性林大匠輰交/大定二十二年壬寅四月日”명 암키와이다. “大定二十二年”은 고려 명종 12년(1182)이다. 2차 중창기는 16세기경이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점은 寺名이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중심사역의 금당지 앞쪽에서 출토된 기와편에 사찰의 명칭을 표현한 “□國寺"명 암키와가 출토되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國”字 앞부분이 잘려나가 명확한 사명을 알 수 없으나 이곳에 “希國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숭선마을의 전승과 명문의 내용이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6세기에 사찰을 중창하면서 寺名이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숭선사지에서는 국내 최초 사례인 금동연봉장식와정을 비롯해 왕실사원의 품격에 맞는 최고 수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청자연봉장식와정과 백자연봉장식와정만이 알려져 왔으나 표면에 금을 도금한 금동연봉장식와정이 최초로 발견됨으로써 건축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금동불상과 동탁, 중국 청자와 최고급의 고려 청자, 개경의 고려 왕궁에 쓰인 막새와 동일한 형태의 연화문수막새를 비롯한 각종 와전류 등은 숭선사의 수준을 가늠하는 자료로 평가된다.

발굴유적

충주 숭선사지 발굴유적 사진(금당지, 추정 영당지, 중심사역)

출토유물

충주 숭선사지 출토유물 사진(숭선사삼보명암기와, 백자연봉형와정장식, 귀목문수막새, 서까래기와, 분청사기 장군, 연화당초문암막새, 수끼와, 금동연봉장식와정, 귀면와, 분청사기철화초문호, 동탁)

제천 장락사지(堤川 長樂寺址)

장락사지는 충북 제천시 장락동 65-2번지 일대에 위치한 평지가람터로 사역의 남쪽에는 ‘堤川 長樂洞七層模塼石塔’(보물 제459호)이 건립되어 있다. 장락사지에 대해서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한 차례의 시굴조사와 세 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사지에서 출토되는 회백색연질토기편과 연화문수막새기와, 무문암막새기와, 승문평기와, 두께 1cm 내외의 얇은 선조문평기와 등의 제작시기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미 삼국시대말경에 사찰이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구는 총 34개소의 건물지와 답도 3개소, 담장 4개소, 부석시설, 우물 등이며 유적 전 지역에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장락사지의 1차 중창기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모전석탑과 6동의 건물, 담장이 건립되었다. 2차 중창기는 고려시대 중기인 12세기경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건물지는 총 17개소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몇몇 건물지 기단토에서 석탑부재가 전용된 사례가 확인되어 석탑도 이때 중건된 것으로 판단된다. 조사지역 전반에 걸쳐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고 있어 장락사지에 있던 사찰의 가장 융성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長’자명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늦어도 고려 중기부터는 ‘長樂寺’라는 寺名으로 법맥을 이어왔음이 확인되었다. 3차 중창기는 고려시대 후기이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건물지는 10개소로 2차 중창기에 비해 규모가 약간 축소되었다. 또한 건물들의 축선이 기존의 남-북 방향에서 서향 중심의 가람배치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4차 중창기는 분청사기와 파도문기와를 볼 때 조선 전기인 15세기경으로 판단되며, 6개소의 건물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5차 중창기는 조선 중기이다. 해당 건물지는 5개소로 조선 전기에 비해 건물 수는 큰 변화가 없지만 건물의 규모가 작아지고, 사역도 약간 축소되었다. 장락사는 『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사세가 많이 약해졌거나 폐사되었을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사역에서 18세기 이후의 유물이 극히 소량인 점을 고려할 때 늦어도 18세기 이전에는 폐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삼국의 문화적 특성이 다양하게 혼재된 삼국시대 제작의 기와류와 고려시대 건물 기단토에서 진단구로 매납된 많은 수의 토기이다.

발굴유적

제천 장락사지 발굴유적 사진(장락동7층모전석탑, 구들과 고래, 답도, 발굴조사 후 전경, 우물지, 기단토에 매납된 진단구)

출토유물

제천 장락사지 출토유물 사진(치미,연화문수막새,석제화살촉,치미,청동완,숟가락,귀목문암막새,토기항아리,청자잔,이형토기,토기뚜껑

영동 영국사(嶺東 寧國寺)

영국사는 통일신라 하대에 창건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법맥을 이어오는 충북 지역의 유서 깊은 고찰로서,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1398번지 일원의 천태산 東麓에 자리하고 있다. 1998년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영국사와 주변 유적의 현황을 파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2003년부터 2009년까지 2차례의 시굴조사와 3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구는 건물지 8개소, 답도, 석축 7개소 등이고, 대웅전 기단 하부에서 18세기에 조성된 유구가 확인되었다. 초창기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통일신라 하대로 추정되는 보물 제533호인 영국사 3층석탑과 銅製佛像, 선문기와를 볼 때 영국사는 적어도 통일신라 하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차 중창기는 영국사가 圓覺國師 德素의 하산처로 정해지고 그의 死後 석조부도와 비가 건립되는 12세기로, 가장 격식 있는 건축미를 펼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차 중창기는 출토유물의 명문과 제3건물지와의 토층관계 및 유물의 출토상황을 고려할 때 고려 후기로 추정된다. 3차 중창기는 16세기로 구사지 지역의 가람이 모두 조성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와 관련된 유물은 “…弘治十三年(1500)”명 수막새, “嘉靖三十八年…(1559)”명 암막새, “萬曆九年…(1581)”명 암막새 등이다. 4차 중창기는 17~18세기로 다양한 유물에서 명문이 확인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康熙六年(1667)”명 암막새, “崇禎紀元後七十四年(1701)”명 法堂成造施主名錄, “康熙四十一年(1702)”명 대웅전 망와, “康熙四十八年(1709)”명 靈山會後拂幀, “康熙五十年(1711)”명 대웅전 용마루기와, 대웅전 해체 시 발견된 “擁正七年(1729)”명 상량문, “乾隆二十四年(1759)”명 대웅전 망와, “乾隆二十六年(1761)”명 범종, “乾隆肆拾參年(1778)”명 上樑文 등이 있다. 이 시기는 가장 대규모 중창불사가 행해진 시기로 영국사의 최고 융성기라고 할 수 있다. 5차 중창기는 1874년부터 1907년까지로, 이와 관련된 기록은 “寧國寺事蹟文”과 1893년에 기록된 “寧國寺重修記”, “大聖山三祝堂上樑文”, “光武十一年”명 七星幀畵 · 獨聖幀畵 · 神將幀畵 · 上壇幀新造成幀畵 · 山중神圖收山初幀畵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6차 중창기는 朱奉祖師가 현 영국사를 중창한 시기로 1934년의 기록인 “寧國寺重修記”에서 그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발굴유적

영동 영국사 발굴유적 사진(1차 발굴조사 후 전경, 누각건물지 및 축대, A지구 제3건물지 남쪽기단, 계단지)

출토유물

영동 영국사 출토유물 사진(청동여래입상/금동여래입상,연화문수막새,백자연봉형와정장식,나발,원통와관,범자명수막새,석제사자상,석제나한상,토기등잔)

충주 김생사지(忠州金生寺址)

김생사지는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65-5번지에 위치하며, 명칭은 통일신라시대의 명필 金生이 이곳에서 頭陀行을 닦았다는 기록과 金生堤防과 관련된 전설로 기인한 것이다. 최근 발견된 『修山集』의 金生寺重修記에 따르면 “김생사는 蘂城의 북쪽 나루에 있었다. 절 아래로는 錦障江이 동북으로 흐르고 동북쪽으로는 여러 산으로 사면이 둘러 싸여 있었다.”라고 하여 구체적인 지명을 밝히고 있다. 이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金生寺는 北津崖에 있으며 김생이 이 절에서 頭陀行을 닦았고...”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김생은 김생사에서 수행했으며, 후세인이 김생을 기리는 뜻에서 김생사로 명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4년도 중앙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에서 “金生寺”라고 좌서된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김생사의 존재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통일신라 유구는 사역의 남단과 동단부에 대규모의 석축시설만이 남아 있을 뿐 대부분 유실되었다. 유적의 서쪽에서 확인되는 유구는 고려~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중요 출토유물로는 “咸通十三(872년)”명 암막새와 고려시대 건물지 기단토 내의 목곽과 그 안에 켜켜이 매납된 청동제 그릇류이다.

발굴유적

충주 김생사지 발굴유적 사진(발굴조사후 전경,목곽노출상황,목곽노출상황)

출토유물

충주 김생사지 출토유물 사진(치미,귀목문수막새,귀면와,함통십삼명암막새)

제천 덕주사 극락전지(堤川 德周寺 極樂殿址)

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법주사의 말사이며 보물 제 406호인 덕주사마애불과 여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충북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덕주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신라 진평왕 9년(587)에 창건되었다는 구전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 할 만 한 기록이나 유물은 없다. 하지만 덕주사마애불의 조성시기가 고려 초기로 편년되고 있어 이 시기에는 덕주사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덕주사는 上德周寺와 下德周寺로 구분되며 극락전지는 덕주사마애불과 함께 상덕주사에 속한다. 극락전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건물의 구조와 기단 하부의 중첩유구를 확인하여 극락전 복원의 기초자료로 삼고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명문기와 중 漢字와 한글이 병기된 명문암막새가 출토되었는데 매장문화재 조사에서 최초의 사례이다. 명문의 내용은 “乾隆九年甲子三月日施主淸信女奻信居士奻□”라고 하여 제작연대와 시주자에 대한 내용을 한자로 양각하고, 좌측에 “□새시쥬통졍태부옥(?)리”라는 내용을 한글로 음각하였다. ‘乾隆九年’은 조선 영조 20년(1744)으로 유물의 시대편년과 당시 한글의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유구의 기단토 내에서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로 여겨지는 기와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극락전이 건립된 시기는 조선 중기로 추정된다.

발굴유적

제천 덕주사 극락전지 발굴유적 사진(덕주사마애불,극란전지,기단,계단,불단지)

출토유물

제천 덕주사 극락전지 출토유물 사진(천계임술명 암막새, 건융구년명 암막새, 덕주사명 망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