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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생애

故 月岡 오범수 선생 이미지

한국의 중추를 이루는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분기하여 충북의 북부와 충남의 중앙을 남서 방향으로 뻗은 차령산맥의 주봉 중의 하나인 고람산의 정기가 뻗어내린 忠北 淸原郡 賢都面 友鹿里에서 1919년 9월 27일 月岡 吳範秀 先生은 출생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두뇌가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던 선생은 고려조의 명문인 寶成 吳氏 副尉公(敍仝)의 16대 손으로 엄격한 부친(淵成公)과 자애로우신 모친(交河 盧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선생은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여 四書三經에 통달하였으며, 학창시절의 학업은 언제나 우수하였고 생활은 모범적이었다. 향리에 있는 芙江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선생은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東京에 있는 倉平中學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선생은 조국건설의 역군이 되고자 日本大學 工學部에 입학하였다. 특히 한국의 토목시설이 낙후되어 있음을 통감하던 선생은 토목공학을 전공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학업에 전념하였으며,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3월에 일인을 제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조국에 돌아온 선생은 해방 후 군정청 교통부 해사국에 잠시 근무하며 인천항 건설 등 토건 및 건설 분야의 기술직에 종사하다가, 평소 교분이 깊던 해군참모총장 孫元一 제독의 권유로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48년 2월에 특3기로 졸업하였다. 해방과 함께 사상적인 혼미가 계속되던 시절, 해군장교로서 국가장래를 염려하던 선생은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요충지가 될 것으로 예견하였다. 한반도를 수호하는 길은 강력한 해군이라는 신념으로, 해군의 전력증강에 힘쓰던 중 동족상잔의 6.25사변이 발발하였다.

평소 선생은 애국애족의 사상이 남다르고 의리와 신의를 중시하며, 치밀하고 조직적인데다가 추진력이 뛰어난 기질을 가진 젊은 장교였다. 한반도가 일진일퇴의 격전장이었을 때 선생은 해군 시설부장 및 군항건설단장으로 복무하였다. 연합군의 병참기지로서 수송의 필수요건인 군항의 절대적 확보라는 작전명령을 받은 선생은 현대식의 광대한 신군항 및 기존항구의 확장보수 등 중대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젊은 시절의 혈기를 불태워 온 해군에서 1954년 예편한 후 선생은 (주)대한건설공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의 직을 맡았다. 토목 및 항만건설에 전력하여 전후복구를 위한 물자하역능력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한토목학회 이사의 중책을 맡아 폐허화된 복구사업을 비롯해 국토건설사업에 진력하였다. 실업가로서 위세를 떨치던 선생은 한국에 급선무가 경제건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경제발전만이 한국을 부강한 민주사회·복지국가로 이끌 것이라고 판단한 선생은 큰 뜻을 품고 정계에 투신하였다.

신념과 지조의 정치인 월강

故 月岡 오범수 선생 이미지

선생은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 고향인 청원군에서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 청원군당위원장을 맡은 선생은 그해 5월 청원군갑구에서 제4대 국회의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의정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선생은 당내에서도 시시비비를 따지는 비주류의원으로 매사에 위국위민의 정신으로 소신 있는 의정활동을 하였다. 특히 자유당 집권당시인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임하여 경무대에 들어가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부정선거를 만류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자유당정권이 붕괴되면서 당시 자유당 인사는 반혁명분자라는 이름으로 매도되었다. 그 와중에서 헌정사상 최초로 양원제의 총선거가 1960년 7월 29일 실시되었다. 선생은 상원인 참의원에 입후보하였다. 자유당의 요직에 있던 인사조차 무소속으로 떳떳치 못한 출마를 하는 실정에서 선생은 당당하게 소속정당을 자유당으로 하여 자신의 의정활동에 대한 추상같은 심판을 받겠다는 각오로 입후보하였다. 선거기간 중 일부 세력으로부터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초대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 국방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념과 소신, 의리와 신의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은 선생의 독특한 기품이다. 혼란과 격동이 계속되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의회가 해산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탄생하여 혁명세력이 군사정권수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선생은 윤보선 전 대통령, 이범석 장군, 장택상(전 국무총리)씨 등 한국의 대 정치원로들 및 재야 정객들과 협의하여 살벌하고도 험악한 그 시절에 군정연장 반대투쟁 위원회를 조직결성하고 사무총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고난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난세 하에서 불굴의 정신을 가르쳐 준 정치인이었다.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선생은 국회의원동우회 상임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전직 국회의원들의 친목활동에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생활이 어려운 선후배 전직의원들을 돕기도 하면서 라이온스클럽 활동을 비롯한 많은 봉사활동과 각종의 사회활동을 통하여 왕성한 활력을 과시하였던 선생은 지조 있는 정치가로 오늘날에도 많은 정치인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국가발전을 위하여 언제나 용감하고 헌신적이었던 선생은, 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차세대 역군을 양성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판단하고 육영사업에 뜻을 두게 되었다.

선비정신의 위대한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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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자신의 모든 사업과 재산을 출연하여 대학을 설립할 뜻을 펼쳐나갔다. 특히 한국의 현실은 기초기술이 빈약한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라고 판단하여 전문 기술인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교육낙후지역인 강원도에 대학을 설립하자는 권유가 많았으나 선생은 나를 낳아준 내 고향, 7.29총선 때 깨끗한 표로 심판해 준 충북도민에 대한 보답을 하기로 작심하고 부지를 물색하다가 현재 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忠北 淸原郡 江內面 月谷里에 대학설립을 결정하게 되었다.

1980년 학교설립추진위원회의 구성과 더불어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일대를 교사 건축부지로 선정하여 매입함으로서 평소 숙원이었던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해 오범수 선생을 중심으로 대학설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선생은 대학설립을 위하여 22억 여 원을 출연하였다. 이를 기본재산으로 학교법인 충청학원이 문교부로부터 1981년 6월 29일에 인가되어 오범수 선생이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그해 11월 17일 교사를 기공한 후 각고의 노력으로 1982년 12월 충청실업전문대학의 설립이 인가되었다. 1983년 3월 16일 드디어 성실, 협동, 창의를 창학이념으로, 7개학과 440명 정원의 충청실업전문대학은 지역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출범하였다. 1989년 충청전문대학으로, 1998년 충청대학으로의 교명변경과 함께 전국 최고의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중흥기를 맞이한 충청대학은 '세계청소년태권도문화축제'를 개최하면서 국내외에 그 명성을 드높이면서 입학정원 2,960명과 위탁학생 700여명으로 7천여 명의 재학생이 첨단의 시설과 최고의 교수진으로 혼연일체가 되어 면학하는 전국 최고의 대학으로 성장·발전하고 있다.

개교 이후 국가에서 최우수대학으로 인정받은 대학, 실무중심형 교육과정 운영으로 취업이 잘 되는 대학, 첨단교육시설과 인터넷 원격교육을 통한 21세기형 교육시스템이 구축된 대학, 자매결연 및 학점교류로 세계와 함께 하는 대학, 넓은 캠퍼스와 다양한 후생복지 시설의 학생중심 대학으로 성장하기까지, 불철주야 후학양성에 혼신의 힘과 정열을 바쳐 충청대학이 오늘날의 명문사학으로 정립되는데 초석을 이룩하였다.

국가의 장래를 짊어질 인재양성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바치신 월강 오범수 선생은 21세기를 향해 더욱 전진하는 충청대학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1997년 4월 29일 서거하여 그 위대한 생을 마감하였다.